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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달이 훅 지나갔다. 이제 사실상 휴학일기라고 할 것도 없다. 

 

뭔가 감상이나 깨달은 바 같은 것을 좀 써 보려다가, 별로 재미도 감동도 없을 것 같아서 거짓말도 하고 이것저것 섞어서 떠오르는 대로 남기려고 한다. 그리고서 이 글을 마지막으로 휴학일기 카테고리는 마무리를 해야겠다(설마 몇 년 뒤나 언젠가 또 뭔가를 적게 되지는 않겠지? 지금으로선 바라지 않지만 그렇게 된대도 재미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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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다. 문득 정신을 차려 방 안의 사물을 하나하나 둘러보기 시작했다. 노트북 옆에 있는 그릇에는 식빵 부스러기가 남아있고 그 옆에는 물티슈, 가위, 족집게, 귀이개 같은 것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손에서는 피가 흘러내려 키보드에 찐득하게 들러붙어 있었는데, 아마도 족집게나 손톱깎이 같은 것으로 괜히 살점을 잡아뜯었던 것 같다. 어릴 때는 집중하거나 불안할 때 나오는 버릇이었는데 왜 지금은 아무 생각이 없을 때도 자꾸만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흠. 사실 그냥 재미있어서 그러는 것 같기는 하다. 어째서 내 손톱은 도통 예쁘고 깔끔하게 나지가 않으니, 어떻게든 다듬으려고 이리저리 시도를 해 보는 것이다. 뭔가가 툭 튀어나오니 그걸 잘라내고, 둥근 부분을 약간 각지게 잘라내고, 큐티클 부분을 도려내보고. 그러다보면 나도 예쁜 손톱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결코 그러는 법이 없다. 나는 아마도 방법을 모르는 것이었거나 타고나기를 절대로 예쁜 손톱이 될 수 없었던 운명이었을 테다. 하긴 생각해보면 내가 예쁜 손톱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영 어울리지 않는다. '단정하고 깔끔한 손톱을 가진 S양이라는 것은 상상불가능하다' 같은 명제는 매우 그럴 듯하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떼어내기 힘든 습관이나 품성 같은 것들이 있는 법이고, 나의 경우 하나를 꼽아보자면 손톱을 잘 기르지 못하는 점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12시 10분쯤 다시 '생각'을 시작했다. 어젯밤 그에게서 새롭게 들은 이야기가 있는데, 골백번 생각해봐도 이제 나는 더 이상 그에게 새로운 것을 듣거나 놀랄 일이 없겠다는 판단이 선 것이다. 그것은 꽤 의미 있는 발견이었다. 순간 나는 자기 삶에 대해 생각하고 인식의 자유로움과 환상을 통해 운명의 탈출구를 상상하는 이들에게는 결국 진정한 변화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경우든 그의 경우든 너무나도 계획적으로, 정확하게 그리고 투명하게 자극을 반영하려 하기 때문에 도대체 학습이란 것이 가능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익히고 뻗어나가는 힘은 자신을 말살하는 데서 오는데, 쇄신과 자기파기에서 오는 것인데, 우리는 너무나도 진실에 집착하고 있었다. 그 힘이 어디서 오든 간에 그것은 손톱을 물어뜯지 않는 나를 상상할 수 없는 정도의 강력함을 암시하고 있었다. 

 

"좋아해, 함께 있고 싶어, 보고 싶어."

 

이런 말을 하자 나는 행복해졌다. 이제까지 그에게서 느낀 것을 바탕으로 내가 동원할 수 있는 감각을 모아 있는 힘껏 상상했다. 손을 잡고 안전한 어느 곳에서 계속 곁에 있게 된다면... 시선 끝에는 바다나 하늘, 빛 그런 것들이 어려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태도는 모두 그에게 배운 것이다. 그는 현실의 빛이 꺼져 있을 때 허튼 말을 않는 사람이었다. 몸에서 일으키는 반응에 짜증을 내기는 했지만 그래도 섣부른 판단들을 경멸했다. 나에게는 비어있는 순간을 채울 호흡이 부족할 때마다 이런 저런 말도 안 되는 판단들을 만들어 말을 붙이고 누군가들을 파렴치한으로 만드는 나쁜 버릇이 있었는데, 그러다 그에게 호되게 한 방 먹은 적도 있었다. 언젠가 그와 산책을 하면서 어줍잖게 학교를 다닌다는 것은 모순투성이라느니 인간들은 모두 자기기만을 저지른다느니 그런 말들을 늘어놓으며 범인을 밝히듯 나의 태도를 비겁성으로 정체화하고 있었다. 그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말이 안 되는데. 그런 걸 '생각'한다고?"

 

그 순간 나는 나를 잃어버렸다. 사고 작용의 엄정한 자기 감시와, 사고를 이용해 내 감각의 두 팔을 잡고 장난치는 것에는 분명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진정한 나의 악덕과 비겁성이 탄로났다는 부끄러움 때문에 몸을 떨지 않을 수 없었다. 조이던 사고의 끈이 턱 풀어지면서 몹시도 창피해 했었는데, 다행히도 그는 이런 걸 기억하지 않았(던 것 같았)기에 나는 그 앞에서 두 번 다시 그런 불평을 늘어놓지 않았다. 

 

물론 나에게도 힘든 점이 있고, 그가 이해하고 못하고 상관이 없는 문제들이었다. 다만 나는 언젠가부터 스스로가 초라한 것을 견딜 수가 없어 아예 별 생각을 않은 채로 살아가곤 했었는데, 어쨌든 그를 떠올리면 나의 온갖 문제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에 더욱 악덕을 저지르기 쉬운 상태가 되었던 것이다. 원래 인간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 이상을 받고 싶은 마음 때문에 온갖 짓이든 하게 되어 있다. 나로서는 평소 세상이란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여기어'졌'고 인간을 사랑할 마음도 결코 갖지 못했지만, 언젠가부터 그렇게 그를 사랑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세상의 그 많은 것들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바라볼 힘을 얻어 '버렸던' 것이다. 

 

그는 삶에 그러모을 만한 것들이 없을 때 삶 너머를 내다보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실내에는 푸른빛이 없었지만 창문 밖에는 하늘이 있었다. 아, 앞으로도 하늘을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겠구나. 그는 그런 말을 했고 나는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의 담백한 슬픔을 단번에 이해해버렸다는 생각을 했다. 말 한마디에 의지하고, 마음 한 자락에 구원받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세상을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것이구나, 배웠다. 그러니까, 정말 사랑한다면 서로를 바라보고 허무로 미끄러질 일이 아니라, 손을 잡고 세상을 바라볼 일이었다.

 

허무에 빠져있는 모두가 불행하고 우울하지는 않다. 나는 곧 죽어도 좋을 상태였지만 순간을 거머쥐어 그 이상 행복할 수 없었다. 의미가 있어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의미를 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투명한 사람이라 어제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되었을 때 그 사실에 변화가 없으리라는 것을 느꼈다. 그로 인해 투명해진 지금의 나, 진실에 집착하는 내가 더 이상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인식에서 벗어나 행위로 가려고 하지만, 인식 안에서 발버둥치고 있었고 그런 사람들은 결코 변화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느낀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인식에 갇혀 세상을 다 살아본 것처럼 구는 아이였다. 많은 것이 변해 나를 알아볼 수 없게 된대도, 어딘가를 향해 뻗고 있는 마음이 아니라 단지 인식을 헤매고 있는 마음이라면 언제까지나 그대로일 수밖에 없음을 12시 30분에 나는 깨달았다.

 

나는 몸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결코 나를 사랑하지 않을 그를 생각했다. 언제까지나 그를 사랑할 나를 떠올렸다.

 

“좋아해, 함께 있고 싶어, 보고 싶어.”

 

그런 말은 나에게, 나의 하늘을 내다보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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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다 쓸어갈 마음이지만 순간은 영원과 등을 맞대고 있어서 내가 흐르는 시간에 산다면 순간이겠지만 멈추어 있는 시간에 산다면 영원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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