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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맨 끝줄 소년>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
191112 (화) 20:00
★★★★★
후안 마요르가. 스페인 작가. <맨 끝줄 소년>
라틴아메리카에서는 20세기에 들어 독창적인 상상력으로 문학과 연극 분야에서 기존의 경계를 허무는 작품들이 다수 등장했다. 이들은 '뭐라고 정확하게 규명하기는 힘든데' 기존의 문법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독자를 잡아끄는 이야기를 쌓아올린다. 여기, 이 연극도 그러하다. 작품속에서 문학 선생님 '헤르만'의 발화를 통해 끊임없이 보여지듯이 소설에도 소설만의 '법칙'이 있다. 맨 끝줄 소년 '클라우디오'는 그가 쓴 글에 대한 헤르만의 코멘트를 듣고 그가 건네준 고전들도 읽지만, 사실상 그 법칙들을 무시하면서 소설을 쓴다. 그리고 그것은 이 작품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방식이기도 하다. 기승전결이나 갈등의 면모가 뚜렷하지 않은 클라우디오의 소설은, 그리고 이 연극은, 어쩐지 '그 자체로' '몸으로' 보여주는 무언가가 있는 듯 하다. 도대체 그게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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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 열흘 새에 연극을 세 편 정도 본 것 같다. 꽤 마음에 드는 작품들이었기에 돈이 아깝지는 않은데 어쨌든 통장에서는 신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그래도 아직 대학생이라 정말 다행이다. 1층 B블록 5열 35,000원.
예술의 전당에서 전시는 몇 번 보러간 적이 있는데 연극은 처음인 것 같다. 자유소극장은 객석이 양쪽으로 이분돼있다. 무대에서 볼 때 중간에 길이 나있는 것인데, 이런 배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쩐지 몰입도가 약간 떨어지기 때문이다. 중간에 길이 있다 보니 한쪽에 치우쳐 앉아있는 느낌이기도 하고 객석에 앉아있는 '느낌'이 선해서 그렇다. 그렇지만 무대는 정말 좋았다. 나는 위쪽으로 솟아있거나 앞쪽열과 단차가 있는 무대보다는 아래쪽으로 가라앉아 있는 무대를 선호한다. 연극적인 느낌이, 움푹 꺼져있는 곳에서 공간성이 오롯하게 더 살아나는 것 같달까? 또한 자유소극장에서 공연하는 다른 극단들도 활용하는 장치인지는 모르겠는데 인형극 같은 효과를 주면서도 동선을 흥미롭게 짤 수 있는 무대장치가 있었다. 그림자가 비치는 옆, 뒤쪽 벽이 칸칸이 여닫을 수 있도록 돼있어서 배우들이 무대공간의 3면으로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장치였다. 그 공간에 조명을 비추고, 배우들이 그 뒤에서 몸짓을 하는 것이다. 조명과의 시너지도 매우 좋았고, 이 장치에서뿐 아니라 전체적으로 이 공연은 조명을 잘 활용하고 있었다. 외국에 비해 우리나라는 연극에서 조명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는데, 개인적으로 이 작품은 매우 훌륭했다고 생각한다. 조명을 통해 적극적으로 특정 감각을 자아내는 공간을 그때그때 창조해내는 대목이 꽤 있었다. 이는 초반보다는 중후반에서 더욱 강조되는데, 이 작품의 문제의식이 작품의 형식으로도 구현되고 있다는 점과 상통한다.
이제 내용에 대해서 좀 이야기해보자. 사실 이 연극은 우리가 보통 '그 작품 줄거리가 뭐야?'라고 물을 때 기대하는 요소들을 다 담고 있는 작품은 아니다. 대답은 '어... 그러니까 수업 때 늘 맨 끝줄에 앉아있는 어떤 문제적인 소년이 친구 가족을 관찰하고 그걸 글로 쓰는 거야' 일 텐데, 이만하면 이 작품의 서사적 측면에 있어서는 내용이 다 들어갔다고 할 수 있는 셈이기 때문. 수학을 잘 하는 클라우디오는 친구 라파에게 수학을 가르쳐준다며 그의 집에 드나든다. 그는 라파의 집이 어떻게 생겼는지, 가족들은 어떤 사람인지, 그들이 모여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를 묵묵히 관찰하며 글로 적고, 그것을 헤르만 선생님이 내준 작문 숙제로 제출한다. 클라우디오의 글에 매력을 느낀 헤르만 선생님은 그의 글을 계속 받아 읽으며 그를 지도한다. 아주 솔직히 따지자면, 클라우디오가 적어 내는 글은 뭔가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흥미롭고 분위기가 고조되는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그다지 '훌륭하지는 않다.' 거기에는 실제인지 허구가 가미된 것인지 모를 무언가를 쓰는 '행위'가 있을 뿐이다. 헤르만은 점점 더 그의 글에 지적을 해대고, 그의 행위 자체를 문제삼기에 이른다. 결국 클라우디오는 더 이상 그에게 글을 보여주지 않지만, 그의 글쓰기는 계속된다.
그러니까 사실상 거기에는 '글쓰기'만이 있다. 헤르만은 그것을 다듬고 개선함으로써-요컨대 갈등 상황을 극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요소를 고민해보라든지-좋은 글이 되도록 독려하고자 하지만, 클라우디오에게는 자신이 무엇을 보는지 기록하는 것 그 자체만이 관심거리다. 정확히 말하자면, 글을 씀으로써 그는 자신이 보는 것에 점을 찍는 셈이다. 스스로의 존재를 펴는 것이다. 그의 글은 뭔가를 마구 표현해내려고, 탐구를 하려고 쓰이는 게 아니다. 점을 찍고,존재를 새기는, 아니 '존재하는' 행위다. 때문에 그의 존재성은 글을 쓰면 쓸수록 더욱 커져가고, 글로 쓰는 것과 현실의 간극이 모호해지면서 그는 라파 가족에게, 그 가운데서도 라파의 어머니 에스테르에게 점점 더 접근하게 된다. 글쓰기로 움직여나가던 그가 점차 그 존재성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길을 터는 것이다. 그가 에스테르에게 건네는 시가 바로 그런 의미다. '중산층 여인의 향기'를 묘사하던 그는 무료하고, 도배를 할까(리모델링이었나 아무튼) 고민하다 그만두고, 마티니를 마시며 무료한 오후를 달래는 그녀의 존재에 점점 더 잠입해간다. 그녀를 응시한다. 그리고 클라우디오는 참을 수 없이 내뱉는다. '비조차도 저렇게 맨발로 춤추지 않는다'라고. 에스테르와 키스하는 장면은 어떤 성적인 것, 내적 욕망의 발현이라기보다는 그렇게 클라우디오의 존재가 경계를 넘어가는 과정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 장면에서 매우 야릇하고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결국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가는 클라우디오라는 인물이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느냐를 보이는 것이다. '라파 가족은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라고 궁금해할 수 있다. 그런데 딱히 결말이라고 할 만한 게 없다. 이것은 애초에 틀 속의 이야기, '허구'가 아니었으니까. 헤르만은 허구를 잘 쌓아올릴 수 있는 문법에 대해서 말하지만 클라우디오의 글은 처음부터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냥 했을 뿐이다. 목적성을 지니고 무언가를 정의하고 움직이는 방식으로 쓰였던 글이 아니라, 단지 존재하고 응시함으로써 경계를 허무는, 이를 통해 본질로 잠식해가는 '행위'로서의 무언가였다는 것이다. 나는 후안 마요르가가 '이런 것도 글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마지막에 클라우디오가 헤르만의 집으로 시선을 돌리고 그의 부인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을 때, 헤르만은 그를 후려친다. 애초에 존재의 형식이 다른 그와 클라우디오는 그렇게 서로에게 폭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클라우디오의 글쓰기가 헤르만에게는 뺨을 후리는 것처럼 느껴졌을 테니(물론 클라우디오가 문제적 인간인 것이 분명하므로 common sense라고 할 만한 쪽은 헤르만이겠다만). 나는 이 장면의 연출도 정말 훌륭하다고 느꼈는데, 먼저 클라우디오가 객석의 중앙 계단을 오르고-나는 이게 관객과 무대의 벽을 허무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그런 의미라면 클라우디오의 행위의 의미와 너무나 꼭 닮아 있는 것이라 소름이 돋았다-헤르만이 그를 따라 오른다. 클라우디오는 자신이 헤르만의 집에서 그의 아내를 봤다고, 흥미로웠다고(정확한 워딩은 기억이 안나는데) 말하는데, 이 역시 어떤 '선'을 넘는 것이었다. 헤르만은 이를 용서할 수 없고, 뺨을 올려붙인다... 이게 원래 극본에 나와있는 무대 지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등골이 서늘해지는 멋진 연출이었다.
무대는 몇 개의 책상과 걸상으로 채워져 있다. 두 번 정도 세트를 재배치함으로써 110분을 세 타임으로 구획함으로써(break는 없었다) 조금씩 작품의 속도나 흐름, 분위기를 조절하는 것 같았다. 책걸상은 대충 비슷한 디자인이라 그냥 보면 별 차이가 없게 느껴진다. 그러다보니 또 재미있는 것이, 처음에는 인물들이 등장하거나 각각의 만남이 이뤄지는 장소가 고정돼있어서 각 공간이 학교구나, 헤르만의 집이구나, 헤르만의 사무실 자리구나 이런 것을 알겠는데, 러닝타임이 흐르고 점차 클라우디오의 소설이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허무는 행위가 인물들을 혼란스럽게 하자, 어느 순간부터는 인물들이 아무데서나 마구 등장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마지막 세트 변경 때는 책상 네 개가 일렬로 배치된다. 그때에는 인물들이 어디서 무슨 말을 해도 그냥 다 뒤범벅된 느낌이 드는데, 이런 감각이 작품의 메시지, 클라우디오의 정체성(이라고 말하니까 의미가 좀 이상한데 아무튼 그의 행위의 의미)과도 잘 어우러져 고유한 장면을 만들어낸다.
연기. 배우들의 연기는 전체적으로 좋았다. 너무 과하거나 익살스럽지 않은 선에서 에스테르는 조금 더 관능적으로 연기해도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헤르만의 부인 후아나도 약간 뭔가 아쉬웠는데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다. 리뷰를 쓰면서도 그 캐릭터에 대한 이해가 스스로 좀 미진해서 그렇게 느낀 것일 수도 있겠다. 나중에 생각이 들면 추가해서 써야지. 좀 아쉬웠던 것은, 시간상 전박찬 배우가 아니라 안창현 배우가 클라우디오를 연기한 회차를 관람했는데, 예전에 산울림 소극장 <이방인>에서 전박찬 배우의 뫼르소를 굉장히 몰입해서 봤던 거 같아서 보고 싶었는데 아쉽다. 12월까지 하니까 시간 내서 보러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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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씹을 수록 참 괜찮은 연극이었던 거 같다. 후안 마요르가 스스로 말하듯이, 문제를 던져주고 생각하게끔 만드는 극이다. '문제적'이라는 말. 쉽게 쓰지 않는데 이 연극은 그 말의 무게를 품을 만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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