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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8

 

0.

페터 한트케의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Der Kurze Brief zum Langen Abschied>를 읽었다. 사실 감상평이라고 적기 뭐 할 정도로 이해가 미진한 상태이긴 하지만 그래도 문장으로 적으면서 뭔가를 더 얻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하여 몇 줄 적어본다.

 

1.

역자인 안장혁 교수의 해설을 읽어보면 페터 한트케가 전후 독일의 문학계를 주도하던 트렌드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문학의 존재 근거는 언어 그 자체이지 사물이나 대상에 대한 인식에 있지 않다”라는 언어 내재주의적인 입장을 견지하며 당시의 신사실주의적 문학 트렌드나 이른바 참여문학적 문학 풍토와의 결별을 선언했다는 것이다. 그는 러시아 형식주의와 프랑스 구조주의 언어학,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 등에서 사상적 토대를 제공받았다고 한다.

문학 사조들을 개념화해 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과제이다. 공부가 미진한 나에게 이런 방식으로의 이해가 아직 가능하지는 않을 테다. 그래도 어떻게 어떻게 ‘끼워맞춰’ 보자면, 아무튼 간에 어떤 ‘인식’의 구조로 가로막힌 세계의 그림을 거부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와 닮은 세계에 잠입하는 자아를 빚어 핍진성을 바탕으로 실제 세계에서 살아가는 독자들을 위로하는 문학이라기보다는, 요컨대 새로운 규약을 만듦으로써, ‘행위’에 의거한 세계를 빚어가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런 작품들은 그다지 ‘공감’을 애걸하지 않는다. 독자에게 친절하지도 않고, 스스로 설득력 있는 모양새를 구축하려 노력하지도 않는다. 안장혁 교수는 한트케의 행보가 ‘고정관념에 대한 도전’이라 부를 만한 문학적 에토스를 근간에 두고 있다고 말했다. 포스트모던의 냄새다! ‘보편타당하다고 여겨져온 모든 현상의 이면에 모종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하기 위함’이었다는 말이 여기에도 덧붙여져 있다.

 

2.

인식과 행위라는 단어에 따옴표까지 쳐 가면서 둘을 구분하고 집착을 하는 까닭은 내가 요즈음 꽂혀있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 책 바로 이전에 완독한 작품이 <금각사金閣寺>였다. 외서를 번역할 때 무조건 우리말 문체와 문법으로 기름칠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읽은 번역본은 읽을 때 턱턱 걸리게 써놓은 대목이 너무 많았었다. 그래서 내가 유키오의 이해에 제대로 가 닿은 것인지는 사실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거기에서 주구장창 인식과 행위를 대립시켜 이야기한 데서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내 것이 아닌 개념을 너무 오래 쥐고 있는 것 같기도 한데 그러지 않는다면 또 어쩔 텐가. 내 생각에는 인간이 모든 행위를 하는 이면에는 불안과 욕구가 자리하는 것인데, 그렇게 뒤안길만 파다 보면 결국 파멸할 것 같다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된다. 빙산을 드러낸 뒤 잔잔한 바다를 만족스럽게 지켜보는 것이 학자들의 정체성인 것처럼 늘 생각해왔지만, 어쩌면 애초에 그런 건져올림의 작업 자체가 너무도 권위적인 게 아니었나 질문하는 것이다. 너의 정체를 밝혀라! 너 스스로 증명하라! 이런 요구를 하는 것인데, 스스로를 규명해야만 하는 욕구에서 좀 자유로워지고 싶다고 생각하는 때가 있다. 나도 안다. 이건 스스로 멍청해지겠다는 말을 하는 것이고 나의 게으름에 대한 자기변호이고 변화를 촉구하는 세태가 무서워 굴을 파고 들어앉아 있는 것이고 겁쟁이고 뭐 그렇단 걸 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내가 요즘 제대로 하는 일이 없어서 그런 것일 테다. 그런데도 구차하게 문장으로 내뱉고 있는 까닭은 내가 자꾸 어딘가에 닿으려는 마음을 그만두고 싶은 것은 아닐까 의심이 돼서 그런다. 가만히 있다가 몸을 오싹하게 만드는 순간들. 충분하게 존재하고 있지 못하다는 불안감. 옅어지고 싶지 않은 마음. 결여. 아무튼 그런 것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어서 몸부림치는 것이다. ‘나 자신을 있는 대로 긍정하자’라는 말. 이 문장의 의미값도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대목에서는, ‘나의 본모습을 부정하지 말고 받아들이자’라는 의미가 아닌 것이다. 그냥 진짜로 이 공간에 이 시간에 포착되는 수면 위의 나만큼을 전부라고 여기면 안 될까? 하는 것이다. 자꾸 과거를 들먹이면서 나는 ‘지금-여기’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서. 내가 고민했던 시간들도 소중하지만 지금 가냘픈 이 모습도 나다, 싶으니까. 다시 회복할 수 없는 순간들을 그리워하는 데 지쳐버린 걸까? 이런 말을 하면서 또 나는 ‘파기dig’를 하고 있다. 뒤안길을 걷는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일지도.

 

3.

재미있는 것은, 이 책이 내가 요즈음 읽은 그 어떤 책보다도 이런 정신으로 쓰인 것 같다는 감상이다. 한트케의 다른 작품들을 읽어보지 않기는 했지만 이 작가는 과거 이야기를 주절거리는 걸 별로 안 좋아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모르지만, 어쨌든 이 작품에서는 그렇다. 200페이지 동안 ‘나’의 직업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다(... 아닌가? 내가 읽다가 까먹었을 수도 있다...). 짤막짤막 뭔가를 회상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현재의 나에게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지는 제대로 서술돼 있지 않고, 그게 있다고 하더라도 화자는 의식하지 않고 그대로 다음 장면으로 넘어간다. 요컨대 무언갈 그리워하거나 마음깊이 까닭을 가지고 갈망하는 태도를 결코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유디트에 대한 생각이 주기적으로 스치므로 그녀에 대한 생각이 많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지만, 그렇게 현상적으로 관찰되는 것 이상으로 스스로 ‘참여’하고 있지는 않다는 소리다. 작중 클레어와 화자의 입으로 설명되듯이. ‘나는 무언가에 쉽게 연루되는 편이 아니야. 그것을 간단명료하게 정리한 다음 빠져나오지. 무엇 하나도 끝까지 경험하는 법이 없고 그것이 그냥 내 곁을 스쳐 지나가도록 내버려두거든.’ 이런 설명도 있다. ‘그는 어떻게 하나의 경험이 다른 경험을 해석해내며, 또 나중의 경험이 지금의 경험을 어떻게 재해석하는지를 가능한 한 선입견을 가지지 않고 음미하며 관찰하려 했지. 그는 자신은 직접 관여하지 않은 채 모든 경험에 일종의 자유로운 놀이 공간을 마련해준 셈이야. 그가 경험했던 사람들 또한 단지 그를 스쳐 지나가며 춤을 추었을 뿐이고. 그는 그들에게 춤 상대가 되어달라고 부탁하지도 않았고 윤무를 추는 그들을 잡아끌지도 않았어. 어떤 것은 다른 것의 결과일 뿐이라고 여겼지. 당신도 주변 세계가 당신 곁을 스쳐 지나가며 춤을 추도록 내버려두는 타입으로 보여. 당신도 자신을 직접 연루시키기보다는 경험들이 스스로를 연출해 보일 수 있도록 배려하는 편이라는 의미야.’

나는 이 대목이 엄청나게 재미있었고 너무 공감이 됐다. 까닭은? 그냥 스쳐지나가도록 두자. 그냥 그랬다. 이 말을 듣고 ‘나’가 ‘수치심에 진땀을 흘렸’듯이 행동할 수는 있겠지만 그 까닭을 말하지는 말아야지. 어쨌든 그 말 자체가 엄청나게 나를 자유롭게 해줬다면 이해하겠는가?(이해하든 못하든 어쩔 수는 없겠으나)

 

4.

길을 가면서 사람을 붙잡는 것들을 나는 거부하고 있는 것 같다. 감정에 푸욱 빠져 한바탕 꽃놀이를 하는 것을 즐기지 않는다는 게 아니다. 자연적이지 않은 것, 외부적인 것, 나로부터 우러나오지 않은 것들, 스스로 희열을 느끼는 채찍질이 아닌 것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이다. 죄의식이 나를 옥죄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게 아닌 것 같다. 나를 건조하게 규격에 맞는 인간으로 만드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의미가 없는 말이래도 좋다. 무의미를 소거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가공하는 것은 모든 권위가 하는 짓이 아닌가. 나는 적어도 나 자신에게 있어서는 권위를 가지고 행동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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